주님 안에서.

천주에 대한 신앙을 지키다가 목숨까지 바친 순교자들의 피가 흐르는 절두산성지

시냇물48 2014. 1. 17. 21:09

 

조선시대  한강을 건너던 양화(揚花)나루터 옆에 있었던 언덕으로 개화기 때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곳이다.

 한강으로 돌출한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의 머리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 같기도 한 데서 잠두봉(蠶頭峰)·용두봉(龍頭峰)·가을두(加乙頭)라고도 불렀다.

양화나루터는 서울에서 양천을 지나 강화도로 가는 중요한 길이었으며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또한 전국에서 세곡이 조운선에 실려 올라오는 항구로서 농산물의 유통을 담당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잠두봉은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한강을 거슬러 온 프랑스함대에 대적하기 위해 방어기지로 사용되었다.

이곳이 절두산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병인양요 이후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움과 동시에

1만여 명의 가톨릭(천주교) 신자들을 붙잡아 이곳에서 목을 잘라 처형한 데서 연유한다.

한국가톨릭교에서는 순교 100주년째인 1966년

이곳에 순교 기념관을 건립하여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순교정신을 현양하였다.

기념관은 순교자기념성당, 박물관, 순교성인 28위의 유해를 안치한 경당(經堂:지하묘소) 등 셋으로 구분되어 있다.

순교자 기념공원으로 꾸민 앞마당에는 김대건(金大建) 남종삼(南鍾三)의 동상 순교자상

 일본에서 순교한 오다줄리아의 묘 등이 있다.

 

 

절두산이라는 지명은 지리적인 공식 명칭이 아니고

천주교 순교자들의 목이 잘린데서 비롯된 통상적인 명칭이다.

 

 

 

 

양화진의 잠두봉 아레에

지금은 도로가 만들어저 있지만 박해시대에는 한강물이 절벽아래 까지 차 있있다.

그래서 절벽위에서 순교자들의 목을치면 머리가 한강에 까지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천주교회에는 겹경사가 생겼다.

얼마전 두 분의 새 주교가 그리고 이번에 새로운 추기경이 탄생했다.

 

 

성지안의 산책로

성인들의 순교정신을 묵상하며 자신을 돌아보면서 성지를 순례 할 수 있는 조용한 분위기 이다.

 

박해시대에 천주교 신자들은 깊은 신골로 들어가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했었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문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상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상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상 앞에서 경건하게 기도를 바치는 신자분

 

 

어둠을 밝히는 촛불들

 

 

절두산에 세워진 척화비

양화진은 프랑스 함대의 침입이 있던 곳이라 흥선대원군은 이 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양이(서양)가 침범 할 때 싸우지 않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매국이라는 문구가 새겨저 있다.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기리며 기도를 바치는 십자가의 길

이곳을 방문한 천주교 신자들이 기도를 바치고 있다.

 

 

 

 

남종삼등 당시 관리로서 천주교를 믿다가 순교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남인들이었다.

 

 

 

 

 

절두산 순교자 기념성당 

지하에는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다.

 

미사중이라 성당 내부는 촬영하지 않았다.

 

순교박물관은 내부 수리중으로 지금 휴관중이다.

 

 

 

천주교 신자들을 고문하던 형구들을 전시하는 전시관 내부

 

 

고문도구인 인두를 달구던 화로와

태형을 가하던 곤장이 보인다.

 

윤지충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다.

조상들의 신주를 훼손하였다는 죄목이었다.

  

 

성지 아랫 쪽 한강쪽에 세워진 순고 기념탑

탑 중앙부에 형틀이 조각돠어 있다.

순교자들의 목에 채웠던 큰 칼이다.

 

 

순교자들의 모습이 새겨저 있고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저 있다. 

 

 

 

 

순교자들

"천주를 믿지 않겠소." 

한마디면 살려 준다는데도 순교자들은 천주를 배반할수 없다며 죽음을 택하였다.

 

 

절두산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은 밝혀진 것이 29위이나 밝혀지지 않은

많은 하느님을 믿던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