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악성 우륵과 신립장군의 발자취를 따라 탄금대에 오르다.

시냇물48 2014. 10. 12. 19:47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7월 9일 명승 제42호로 변경되었다.

탄금대는 본래 대문산이라 부르던 야산인데

 기암절벽을 휘감아돌며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울창한 송림으로 경치가 매우 좋은 곳이다.

 탄금대란 신라 진흥왕 때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 중 하나인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탄금대는 또 임진왜란 때 무장 신립(申砬)이 8,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장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를 맞아 격전을 치른 전적지이기도 하다.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의 열두대라고 하는 절벽은

신립이 전시에 12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고 하는 곳이다.

전세가 불리하여 패하게 되자 신립은 강에 투신자살하였다. (두산백과)

 

 

충주시에서 개최한 우륵문화제를 다녀오는 길에 탄금대에 올랐다.

 

 

 

 

탄금대의 정상에 지은지 얼마 안되어 보이는 정자가 있다.

 

 

신립장군 순절비각

신립장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임란때 순절한 무장인데 왜군이 처들어와 동래선이 함락되고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자

문경새재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신립장군은 남한강에 배수의 진을 치고 왜군을 맞아 싸웠는데

경과는 전투에 패했고 신립장군은 남한강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다.

 

문경새재를 넘던 왜장이

 만약에 신립장군이 새재에 매복하였다면

왜군이 결코 새재를 넘지 못했을거라 했다는 말이 전해온다.

 

전쟁이 끝난후 조정에서는 장군에게 충장공이라는 호를 추서했다.

 

 

신린장군순절비 

임진왜란 때 이곳 탄금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순절한 장군 신립(申砬, 1546~1592)을 기려 세웠다.

신립은 22세 때인 1567년에 무과에 급제한 후 평안도 병마절도사와 한성판윤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 도순변으로 임명되어 탄금에서 적군과 싸우다 죽었다. (두산백과)

 

 

 

 

보수공사 중인 대흥사

탄금대 입구에서 열두대로 가는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이다.

 

 

 

 

 

 

               

 

   우륵

가야국 가실왕때와 신라 진흥왕 때 악사로 활약한 가얏고의 명인

가야국이 어지러워지자 가얏고를 들고 제자 이문(泥文)과 함께 신라 진흥왕에게 투항하였는데

 왕은 그를 맞아 국원(지금의 충주)에 안치시키고 계고, 만덕, 법지등을 보내어 그의 업(業)을 전습하게 하였다.

 

 

 

 

열두대

신립장군이 왜군을 맞아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우면서

군을 지휘하느라 열두번이나 이 산에 올랐다하여 열두대라 부른다.

 

일부 사람들은 우륵이 이 바위에서 가야금을 연주 했을거라 생각하나

우륵이 충주에 살았고 이 강가에서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기록만 전할 뿐

구체적이 장소는 기록이 없다고 한다.

 

 

남한강이 낮은 산을 휘감고 도는 탄금대

 

해가지고 조용해지면 어디선가 우륵의 가야금 소리가 울려 올 것 같다.

 

 

탄금대교

충북 충주시 칠금동과 가금면 창동리 갈마 입구를 연결하는 다리.

 

 

 

 

왜군과 싸우다가 산화한 충장공 신립장군과 군사 팔천의 혼을 위로하는 위령탑 

 

 

광복후에 조국을 지키다가 산화한 충주, 중원지역의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는 충혼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