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의 한국 최초의 성당은 강화읍에 있는 성당이다.
강화 성당이 1900년 11,15에 축성이 되었고
이때부터 성공회는 본격적으로 한국 포교에 나섰다.
강화 온수리에 있는 성공회 성당은 강화 성당에서 분가 1906년에 세워젔다.
오늘의 글과 사진은 성공회에 교리에 관련된 것은 피하고
한옥으로 지어진 온수리 성당의 성전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온수리 성당을 찾은건 2016,1,31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사제관에 들려서 방문한 목적을 설명드렸더니 사제로 보이시는 분이 나오셔서
한옥성당의 내부로 안내해 주었다.
우리 부부가 가톨릭 신자라서 서로 대화가 잘되었다.
교리나 의식이 가톨릭과 성공회가 큰 차이가 없어서 일 것이다.
영국이 강화도를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던 동기는
강화도가 영국 성공회의 뿌리가 되었던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서안에 있는 ‘아이오나(Iona)섬’과 유사한 입지인데다
병인·신미양요를 경험한 강화도민들이 프랑스나 미국에는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조선 수군양성을 위해 강화도에 들어갔었던 영국인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점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강화도는 유배지로 역사적으로 많은 소외와 압박을 받았고,
그전까지는 교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지역으로 파악되었다.(네이버)
강화도에 지어진 대한 성공회의 두 번째 성당인 온수리 성당(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52호)은
강화읍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 자락의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하여
눈앞에는 초지(草芝)들판이 펼쳐지고 염하 물줄기와 서해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이 성당은 강화읍의 강화성당(1900, 사적424호)과 달리
선교본부의 지원이나 선교사들의 주도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신도들 스스로가 땅을 헌납하고, 자금을 마련하고 스스로의 노력봉사로 지은 성당이다.
나중에 성공회 3대주교가 된 트롤로프신부에 의해 1906년에 건축되었다.(네이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505-3
강화 온수리 성공회 성당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52호
이 교회는 1906년 영국인 주교 조마가가 지은 성당 건물로
우리나라의 서양 기독교 교회양식의 건물이다.
성당은 정면 9칸 측면 3칸의 본당과 종루가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기법을 활용하여 종교적인 성당 건축 방법과
공간 구성을 확립한 동서 절충식 강당형의 목조 건물이다.(성당자료)
종루겸 문루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정면 3칸중 중앙 1칸을 2층 종루로 삼은 문루(출입문)로 사용하고 있다.
성당 건축후에 오랜동안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이 종루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는 신자들은 물론
신자가 아닌 사람들의 마음도 정화시키는 역활을 하고 있다.
사제관(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
사제관은 1906년 건축된 건물이다.
겉은 전통 한옥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영국인 신부가
생활하기 좋게 다양하게 꾸며진 것으로 알려젔다.
내부도 보고 싶었지만 늦은 시간이라 보자고 하지 못했다.
한옥성당의 내부 모습
천정의 서까레가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런 형태는 보기드문 건축 양식이다.
성당안에 들어서니 종교시설의 장엄함 보다
한옥에서 느껴지는 친근함이 먼저 다가온다.
신자석에 앉아 잠깐 기도도 드려본다.
미사를 드리는 제단
제대의 모습
고해소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가 의무인데
성공회에서는 권장사항이라고 안내를 해준 신부님의 설명이다.
낡은 올겐과 제대초
성당안의 14처 그림
사제의 제의와 미사에 사용하던 도구들
각종 경본과 기도서들
온수리성당을 사목했던 역대 사제들
일제시대 독립운동하다가 옥사한 이 교회의 신자인 김여수 마태의 순국비
새로 지은 성공회 온수리 성당
지금은 이 성전에서 미사를 드리고 한옥성당은 문화재로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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