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석모대교가 개통되면서 석모도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강화읍 쪽에서 석모도로 가는 길은 둘이 있다.
첫번째는 외포리 쪽으로 가는 길이고 또 가장 빠른 길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황청리 쪽으로 가는 길인데 그 길이 우리 쉼터앞을 지난다.
외포리 쪽보다 좀은 멀지만 주말에는 외포리 쪽이 차가 많이 막혀서
황청리 쪽으로 가는 것이 빠를 수도 있다.
길은 외포리 쪽이 더 잘 닦여저 있다.
이젠 석모도에 가도 전처럼 마지막 배를 타야 한다는
부담이 없어서 마음 놓고 놀다 올 수 있다.
석모도 개통을 가장 반가워하는 사람들은 절을 찾는 불자들일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 3대 관음성지로 알려진 사찰은 동해쪽의 강릉 낙산사
남해쪽의 금산 보리암(어떤 사람들은 보리암 대신 여수 향일암을 꼽는다.)
그리고 서해쪽의 강화 보문사다.
이 세 관음성지 모두 관음불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낙산사와 향일암은 아침에 뜨는 해를 볼 수가 있고
보문사는 석양에 지는 해를 볼수 있어서
불자가 아닌 여행객들도 많이 찾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직영사찰로서
우리 나라 3대 관음영지(觀音靈地) 중의 한 곳이다.
이 절의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전한다.
635년(선덕여왕 4) 4월, 삼산면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 속에 그물을 던졌더니 인형 비슷한 돌덩이 22개가 함께 올라왔다.
실망한 어부는 돌덩이들을 즉시 바다로 던져 버리고
다시 그물을 쳤지만 역시 건져 올린 것은 돌덩이였으므로 다시 바다에 던졌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귀중한 것을 바다에 두 번씩이나 던졌다고 책망하면서,
내일 다시 돌덩이를 건지거든 명산에 잘 봉안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다음날 22개의 돌덩이를 건져 올린 어부는 노승이 일러준 대로 낙가산으로 이들을 옮겼는데,
현재의 석굴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이 무거워져서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었으므로 “바로 이곳이 영장(靈場)이구나.”
하고는 굴 안에 단(壇)을 모아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신라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고려 초기에 금강산 보덕굴(普德窟)에서 관음진신(觀音眞身)을 친견한 회정(懷正)이
이곳에 와서 불상을 살펴보니, 가운데 좌상은 석가모니불,
좌보처는 미륵보살, 우보처는 제화갈라보살이었고, 나머지는 18나한상과 송자관음이었다.
회정은 이 22존 중 삼존불과 18나한은 굴 속에 모시고
송자관음은 따로 관음전을 지어서 봉안한 다음
이 절을 낙가산 보문사라고 하였다.(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사찰에는 연등 다는 작업이 한창이다.
극락보전
보문사의 본존불을 모시는 사찰의 중심이 되는 법당이다.
경사가 심한 곳에 자리 잡은 탓이라
건물마다 지대의 높이가 다르다.
법왕궁
보문사에 있는 석실.
석모도의 주봉 낙가산 중턱에 있다.
일명 신통굴 또는 나한전이라고도 하는데,
석실 한가운데에는 석가여래상을 안치하고
그 좌우에 18나한상이 배치되어 있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7호
와불을 모신 와불전
범종각
법음루
많은 사찰은 종과 북(법고)을 같은 건물에 배치하는데
이 절은 북(법고)은 법음루에 종은 범종각에 배치 하였다.
윤장대
책장의 일종으로 이 곳에 경전을 넣어 두고
불도를 믿으려 하나 글을 알지 못하거나 불경을 읽을 겨를이 없는 사람이
이 윤장대의 틀을 한번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은 것과 공덕이 같다고 한다.
소원을 써서 넣고 돌리면서 소원을 빌기도 한다.
윤장대를 돌리는 참배객
야외 오백나한전
수령 700여년으로 추정되는 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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