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가장 큰 성 스켄들의 주인공은 단연 어우동일 것이다.
오늘날 같으면야 있을수 있는 일이겠거니 할 사건이지만
유교사상이 사회를 지배하던 조선조에서는 도저히 용납 할 수 없는 어우동의 성 스켄들
여자가 남자들을 섭렵했던 사건의 주인공으로 결국 사형에 처해진 어우동이
충주사진촬영대회 모델로 등장했다.
주최측에서는 어떤 의도에서 어우동을 모델로 네세웠는지 모르겠지만
이날의 모델들중 가장 많은 참가자들이 이 어우동을 따라다녔다.
출생일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고 양갓집 자제로 부친은 승문원 지사 박윤창이다.
종실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과 혼인하였으나 천한 신분의 남자를 끌어들여 문란한 성관계를 맺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 이동에게 소박맞은 뒤 오히려 수십 명의 조관 및 유생들과 난잡한 관계를 가졌으며
그와 관계를 맺은 남자들과 당시 스캔들의 소상한 내용이 《용재총화》, 《성종실록》 등에 남아 전한다.
1480년(성종 11) 어우동과 관련된 성문란 행태가 발각되어 어우동은 의금부에 잡혀갔다.
풍기문란으로 문초를 받았고 관계를 맺은 남자들을 모두 고하였지만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김휘, 정숙지 등의 사대부 고관인 남자들은 모두 혐의를 부인하였고
중인이었던 박강창, 홍찬 등은 하옥되었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사형과 유배로 주장이 나누어졌으나
결국 어우동은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문란하게 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어우동은 시문에도 뛰어나 대동시선에 〈부여회고(扶餘懷古)〉라는 시가 전한다. (두산백과)
부여회고
백마대 빈 지 몇 해가 지났는고
낙화암 선 지도 참으로 오래겠지
청산이 만약 침묵하지 않는다면
천고의 흥망을 물어 알 수 있으리
이날 어우동으로 분장한 모델은 좀 나이도 들어보이고.
남자들을 홀릴만한 요소도 적어보이는데 인기는 있어 보였다.
이 어우동을 따라다닌 촬영 참가자들의 대부분이 남자였던듯.......
이건 웃어보자고 하는 말.
저 어우동의 복장은 고증된 것일까?
아마도 어우동이라는 영화에서 어우동이 입었던 복장인 듯 하다.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김장문화제 김치담그기 한마당축제 (0) | 2014.11.20 |
---|---|
지평선 축제와 벽골제 그리고 단야낭자와 쌍용의 이야기 (0) | 2014.11.19 |
독일 베를린에서 여의도까지 원코리아 뉴라시아 자전거 평화 대장정 피날레 라이딩 (0) | 2014.11.17 |
아름다운 새 꽃 속에서 놀다. (0) | 2014.11.14 |
조경, 도시의 꽃이되다. (0) | 2014.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