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조선조 군사요충지 덕포진

시냇물48 2013. 3. 11. 07:20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이 곳은 서해에서 강화만을 거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이다.

손돌목이라 부르는 이곳은 해안이 좁고 물결이 거세어서

바다 길목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덕포진의 설치 연대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임진왜란의 쓰라린 체험을 한 선조 때 일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조 때만 해도 목선들이 다녔기에

물결이 거친 이곳에서 인명사고도 잦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초창기에는 덕포진의 지위가 높지 않았으나

숙종조 이후 계속 지위가 격상하였고 규모도 확장하여

지휘관의 직위도 높아지고

수군의 숫자도 늘어갔다.

 

전시관 안에는

덕포진 발굴때 발굴된 화포의 일부와 참고 기록들이 전시되고 있다.

 

 

 

덕포진에는 총 15개의 포대가 있다.

가포대가 7개

나포대가 5개

다포대가 3개  

총 15개의 포대가 있다.

 

건너편 감화의 덕진진 남장대도 포대가 15개인데

남장대는 15개 포대가 한곳에 모여 있는 반면

이곳 덕포진은 세곳에  분산 배치되어있다.

 

 

가포대는 강화 남장대를 향하고 있으며

지붕은 이엉으로 되었다.

 

포대의 내부

 

포대의 바닷쪽 외부

 

나포대도 지붕을 이엉을 얹었다.

 

 

 

다포대는 특이하게 기와로 지붕을 덮었다.

 

아랫쪽 건물이 파수청이고

윗쪽 무덤이 손돌의 무덤이다.

 

손돌의 묘

뱃사공이던 손돌의 이름에 公이라는 호칭이 붙어있다.

 

손돌은 어떤 인물인가?

고려 고종때 몽고의 침입으로 고종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강화해변의 뱃길을 잘 아는 손돌이 배를 몰게 되었다.

물결이 거세고 소용돌이치는 강화해협에서

왕의 일행이 볼때 손돌이 모는 배는 직선으로 가지않고

얼뚱한 방향으로만 배를 몰고 가는 것으로 보이자

왕은 손돌이 왕을 해치려는 마음이 있다고 보고 목을 밴다

손돌은 죽으면서도 충성심을 보이며

바다에 바가지를 띠우며 그 바가지를 따라가면 

무사히 강화도에 가리라고 하였다.

과연 손돌의 말대로 고종 일행은 무사히 강화에 도착하고

고종은 손돌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알고 후히 장사지내고

가족들을 돌보았고 제사도 크게 지냈다고 한다.

 

이 곳은 군사요충지로 지금도 군인들이 경비를 하고 있다.

 

 

바다건너 성벽은 광성보에 속한 용두돈대다

이 바다의 물결은 매우 거칠어

평상시에도 물살이 빠르게 소용돌이치며 흐른다.

 

 

 

파수청 터

 

 

 

 

 

병인 양요때 덕포진에서 손돌목을 통하여 강화에 상륙

프랑스 군에게 큰 타격을 입혀

전세를 바꾼 양헌수 천총